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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읽고쓰다

[책읽기] 인간 실격

by KANG Stroy 2023.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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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제   인간 실격
  저      자   다자이 오사무
  출 판 사   을유문화사

다자이 오사무의 삶 자체가 어둡다고 해야 할까요? 여러번의 자살을 시도한 끝에 성공?을 하게 되죠. 자녀가 있는 아버지로써 올바른 선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인간 실격은 다자이 오사무의 인생이라고 봐도 될 만큼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책속의 주인공인 요조는 자신의 생각을 숨기고 성장합니다. 자신의 진지함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으로 비쳐 집니다. 일부러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고, 실수한 모습이 친구에게 밝혀 질까봐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성장하여 타지로 나가 공부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호리키' 를 만나면서 술과 여자를 접하게 됩니다. 모든 여자가 자신을 좋아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것 같습니다. 빨리 헤어지기 위해서 키스를 해 버리기도 합니다. 자신이 정말 좋아 했던 사람은 술집의 종업원이기도 했습니다. 같이 동반 자살을 시도 하지만 요조 혼자만 살게 됩니다. 

 

자살을 하기 위해서 여인과 함께 동반 자살을 시도 합니다. 혼자 무엇을 해 보지 않았기에 자살을 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끌어들인것은 아닐까? 왜? 혼자 자살하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화가 나기도 합니다. 혼자 가는길 외롭지 않으려고 동반자살? 종종 뉴스에 나오는 일가족 동반자살의 기사를 봅니다. 자녀를 왜? 부모이기에 함께 간다?

동반자살은 없다고 봅니다. 죽음은 혼자 가는것이기에 동반자살은 없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자녀들과 함께 간다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을 살해하고 간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자이 오사무는 자살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듯 보입니다. 살고자 하는것 보다 죽고자 하는 마음이 더 있지 않았나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330) 신에게 묻노니, 신뢰는 죄이런가?

요시코가 유린을 당했다기보다는 요시코의 신뢰가 유린당했다는 데 있어서, 내게는 그것이 그후 오랫동안 살아 있기가 어려울 만큼 고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나처럼 천박하고 늘 겁먹고 있으며, 남의 눈치만 보고, 사람을 믿는 능력에 금이 간 사람에게 있어서, 요시코의 때 묻지 않은 신뢰감은 그야말로 아오바의 폭포처럼 싱싱하게 여겨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룻밤에 누런 더러운 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보라, 요시코는 그날 밤부터 내가 한 번 찡그리고 한번 웃는 표정의 변화에까지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요시코가 겁탈 당할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요시코를 괴롭힙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요조. 다자이 오사무는 신에게 기대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까요? 

347) 신에게 묻노니, 무저항은 죄이런가?

호리키의 저 괴상하고도 아름다운 미소에 나는 울었고, 판단도 저항도 잊어버리고 자동차에 타고, 그리고 여기 끌려와서 미치광이가 되었습니다. 이제라도 여기서 나간다 해도 역시 나는 미친 사람, 아니 폐인이라는 낙인이 이마에 찍히게 될 것입니다.
인간실격.
이제 나는 완전히 인간이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여기 온것은 초여름 무렵으로, 철창으로 병원 정원의 조그마한 연못에 수련꽃이 피어 있는 게 보였습니다.

책 속의 요조는 잘못된 선택에 빠진것은 아닐까요? 쉬운 사랑만을 하지 않았을까요? 술집의 여인들을 만나면서 너무도 쉬운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이 영원하기만을 기댄것은 아닐까요? 책속에서 형제와 아버지가 나오지만 어머니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자이 오사무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받지 못한것은 아닌지? 아니면 요조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않고 주변의 여인들 속에서 사랑을 구걸 한것은 아닌지? 

 

본인을 바라보면서 제 3자의 입장에서 본인을 "인간실격"이라고 단정 지은것은 아닌지? 감수성이 풍부한 청소년이 읽기에는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을거 같내요. 우울할때 읽지 말아야 할거 같기도 합니다. 

자살예방상담전화 1393

데카당스 문학

단어 자체는 '퇴폐', '쇠락'이란 뜻을 가지고 있지만,
19세기 프랑스 에서 시작한 문예사조에서의 데카당스는 '퇴폐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예술적인 것'을 지칭한다.
(나무 위키 참고 )
데카당스 개념의 재조명⇒
퇴폐나 쇠락이 아닌 포화된 근대문화에 대한 위기의식의 발현: 현재 문학이나 문화의 위기를 지칭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데카당스’라는 프랑스 단어는 근대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유와 감성을 표현하고 있다.

19세기 프랑스에서 등장한 이 단어가 즉시 전유럽적인 반향을 일으켰다는 사실, 그리고 1900년대 초 메이지 유신 시기의 일본작가들, 1930년대 한국작가들이 자신들의 독특한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이 생경한 프랑스어가 담고 있는 개념에 천착했다는 사실은 데카당스가 유럽과 동양의 근대화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등장할 수밖에 없는 문화현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데카당스가 근대적인 문화현상을 가리키는 새로운 용어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그 개념이 근대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로 등장한 ‘진보’의 개념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견 상반되고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이 두 개념은 ‘동시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근대 초기에는 진보와 데카당스가 순환론적인 관점, 즉 탄생과 성장, 건강과 노쇠, 그리고 죽음과 새로운 삶의 출현 등과 같은 생명체와의 유비를 통해서 이해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 두 개념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학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진보의 개념은 생명체와 관련된 함의, 특히 인간의 삶과 관련된 함의를 상실하게 되면서 생물학보다는 역학(力學)과 관련된 순수한 추상적인 시간의 개념으로 바뀌게 되었다. 즉 끊임없는 발전으로서 파악된 시간관 혹은 역사관은 19세기에 지배적인 가치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진보의 개념은 오히려 인간을 그 시간성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정치·경제·사회적 기본 논리로서 진보라는 개념은 부정되지 않고 여전히 유효하지만, 사람들은 점점 더 진보의 결과물 앞에서 환희가 아닌 상실감과 소외감을 느끼게 되며, 이러한 심리상태는 문학작품과 예술작품을 통해 표현되었다.

참고 : 

https://www.krm.or.kr/krmts/search/detailview/research.html?dbGubun=SD&category=Research&m201_id=10016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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