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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한국사 인물전

by KANG Stroy 2009.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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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한국사 인물전> - 양창진 / 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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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몰랐던 한국사 인물들의 숨은 이야기

어린 시절 우리는 서구 제국주의가 남긴 탐험과 정복과 표류의 기록들을 읽으며 자랐다. 콜럼버스, 하멜, 로빈슨 크루소, 걸리버,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전사와 모험가, 선교사의 이야기가 지금도 추억의 한 대목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도 그에 못지않은 흥미진진한 표류기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혹은 국경을 넘어 서역을 정벌한 사람의 이야기는 어떠한가? 나폴레옹과 한니발이 고작 해야 ‘한 번’ 넘은 알프스는 해발 2,500미터 내외의 산이지만, 우리나라 고선지가 ‘수시로’ 넘나들었던 파미르 고원은 무려 4,500미터에 이른다. 그가 세계 문명 교류사에 큰 획을 그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또 요즘 일이라고 여기는 ‘낙하산 인사’가 과거 우리 역사에 버젓이 있었다는 사실도 놀랍지 않은가? 그 외에도 고려나 조선 시대에는 다양한 방식의 신분 이동이 있었다. 미천한 신분의 제약을 극복하고 스스로 운명을 바꾼 사람도 있었고, 성차별이 일반화된 당시 상황에서 남성과 경쟁하여 당당히 자신의 꿈을 펼쳤던 여인도 있었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으로 사라져간 사람들. 교과서에서 배운 선택적 지식으로는 알 수 없었던 역사 속 인물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이 책에는 가득 담겨 있다.

역사의 인물이 우리 삶을 바꾼다
모든 역사는 인물의 역사이고, 모든 역사 자료는 인물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다. 그것은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가 바로 인간이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같은 맥락에서 보자면, 역사적 인물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것과 같다. 따라서 한국사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입체적인 이해야말로 ‘살아 있는’ 한국사를 이해하는 필수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역사와 인물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지식의 지평을 넓힌다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학창 시절 학교수업을 통해 다양한 역사적 인물에 대해 배우지만, 대부분 그 지식은 단편적이거나 표면적이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한 후에 위인의 전기를 읽고, 그들의 삶과 시대적 상황을 돌아보는 이가 예상 외로 많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역사적 인물의 삶을 전범으로 삼아 자신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이러한 욕구는 때로 인생의 큰 성공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처럼 역사의 인물이 시대를 가로질러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고 하겠다.

우리 역사의 엉뚱한 사건들
이 책은 인물과 일화를 주제에 따라 분류하여 독자가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여기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과 다양한 인물의 일화는 참으로 엉뚱하고 놀라워서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진 독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인물의 심리적 배경이 눈앞에 선연히 떠오르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런 방식의 인물전이 지닌 장점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익히 아는 인물과 주요 사건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데 있다. 흔히 우리가 주목하는 거대 담론보다는 어쩌면 ‘사소하게’ 여길 수 있는 엉뚱한 사실들을 통해 시대정신을 짚어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주입식·암기식 역사교육에 싫증을 느끼는 청소년에게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맛있는’ 역사 교양서가 될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일화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이 질문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대답을 할 수 있을까?

● 혜초는 어떻게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까?
● 강홍립의 묘는 왜 신림동 주택가에 있을까?
● 궁녀 고대수는 왜 개화파의 거사에 가담했을까?
● 김종서 장군은 왜 자주 곤장을 맞았을까?
● 궁녀 김개시는 정말 선조와 광해군 두 임금의 사랑을 받았을까?
● 천민이었던 끝남이, 얼동이, 더퍼리는 어떻게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었을까?
● 우리나라 국왕 중 가장 오랜 기간 왕위에 있던 사람은 누구일까?
● 충선왕은 왜 세계의 지붕이라는 티베트 오지까지 쫓겨갔을까?
● 피타고라스 정리를 푼 조선의 수학자는 누구일까?
● 추사 김정희는 왜 이름을 503가지나 가지게 되었을까? 
● 세종의 며느리 봉씨는 정말 동성애자였을까?

본문 중에서
《표해록》에는 필리핀 풍속이 매우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뒷부분에는 112개의 한국어 단어를 한자로 적은 뒤 마치 조그만 외국어 사전처럼 오키나와어, 필리핀어와 대조하여 놓은 것이 흥미롭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것을 마치 상품 거래목록처럼 꼼꼼하게 기록하는 장사꾼의 철저한 직업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가 기록한 필리핀 말은 후일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51쪽. <홍어장사 문순득의 필리핀 표류기>

강홍립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가 반역자라는 모멸을 받으면서까지 후금과 조선의 화의和議를 주선했던 노력도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후금은 청나라로 이름을 바꾼 후 중원의 패자로서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해나갔다. 이처럼 날로 강성해지는 청나라와의 관계를 소홀히 하고 친명정책을 강화한 조선은 병자호란이라는 참화를 당했고 국왕은 삼전도에서 청의 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을 당해야 했다.
왕명을 받들어 명분도 없고 원하지도 않았던 전쟁에 나아가 포로가 되고, 조국의 미래를 염려하여 배반자라는 치욕적인 낙인도 마다하지 않았던 강홍립. 불과 몇 개월의 여생이라도 조국에서 보내기를 희망했던 조선인 강홍립에게 조국이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79쪽. <조국에 버림 받은 강홍립>

독특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과거에 응시하고 합격한 1637년은 이처럼 국토가 오랑캐에게 유린되던 어수선한 시기였다. 조정에서는 전란 극복을 위해 대규모로 무인을 선발했고 무과 응시자격을 양반의 범위를 넘어 평민에게까지 확대하였다. 그 결과 양반과 평민을 합하여 모두 5,000명이 넘는 인원을 한꺼번에 선발하였다. 과거 기록을 보면 조선 시대에 무관을 1,000명 이상 선발하는 시험을 열 차례나 치렀다. 1676년(숙종 2년)에는 무려 1만 7,652명이나 되는 무인을 선발하였다. 이것은 조선 시대 국운이 위태로웠던 전란이 그만큼 많았다는 방증傍證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무과는 단순한 무관 선발시험이 아니라 그동안 억눌려 살았던 서민이 신분 상승을 도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였다.
난세에 영웅이 탄생한다고 하듯이 전란은 끝남이, 얼동이, 더퍼리와 같은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민초民草에게도 세상에 나아가 역사에 이름을 남길 출세의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다.
136쪽, <끝남이, 얼동이, 더퍼리, 출세하다>

충선왕은 고려인 장원지張元祉 등 18명과 함께 티베트로 갔다. 그가 처음 유배 생활을 한 곳은 토번의 수도인 라사에서 서쪽으로 약 450킬로미터 떨어진 살사결撒思結의 한 사원이었다. 이곳은 오늘날 ‘사캬’라고 불리는 곳으로 원나라 수도로부터 1만 5,000리 이상 떨어져 있었고, 도착하는 데만도 반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고려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세상의 끝과 같은 곳이었다. 충선왕은 머나먼 이국의 유배 생활이 외로웠고 사람이 그리웠다. 그가 토번에서 보낸 편지에는 그의 이러한 심정이 절절이 드러나 있다.
188쪽, <티베트로 쫓겨간 충선왕의 운명>

여기서 할, 푼, 리는 소수점 아랫자리 수를 한자로 표시하는 방식이다. 얼핏 보기에 문제의 해독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학교에서 서양식 숫자 읽기만 배웠기에 한자로 읽는 방식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다.
《산술관견》에서는 정삼각형, 정사각형, 정육각형 등을 활용한 다양한 도형 문제와 풀이 방법이 나온다. 특히, 10만분의 1까지 계산한 것을 보면 조선 시대에 이토록 정밀하게 계산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206-207쪽, <도형 계산에 조예가 깊었던 이상혁>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호가 가장 많은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추사秋史라는 호로 잘 알려진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이다. 오제봉이 조사, 수집한 김정희의 호를 모아 엮은《추사선생아호집秋史先生雅號集》에 따르면 김정희의 호는 무려 503개나 된다. 추사는 김정희의 가장 대표적인 호로서 그가 창안한 필체를 ‘추사체’라 부르는 것도 그의 호에서 온 것이다.
216-217쪽, <503개의 이름으로 불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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