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My Stroy

베트남 패망 원인

KANG Stroy 2011. 11. 16.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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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산주의를 싫어 한다.
그러나 지금의 정부의 도덕성에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럼? 민주당은? 비슷하다고 본다. 
우리와 비슷하게 남과북으로 대치를 한 베트남을 보면 어느정도 대답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래서 인터넷에 떠 돌아 다니는 글을 퍼 와 봤다.
월남 참전하신 아버님은 베트남에서 대모하던 사람들은 지식인 이였다고 한다. 현 정부가 들어 오면서 소통보다는 일방적인 성향을 대화를 하면서 좌파라는 사람들을 생산해 낸거 같다. 국방의 의지는 결여 되고.. 군납을 하는 업체들의 도덕성에도 문제가 발생 하고 있다. 
안으로 썩고 보이는 이면에는 분열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것을 타파할 정치인이 나타나야 하지 않을가?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안철수에게 기대는 것이 아닐까? 
보수는 썩을대로 썩었고 진보는 공산주의의 말을 신봉하는 사람들처럼 보이니? 
나꼼수를 좋아하지만 의심해 볼것은 의심해 봐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북한에 의해서 적화통일 되면 .. 생각하기 좋차 싫다.. 지금의 북한을 보면 지금의 언론 탄압을 넘어서고 있으니.. 감옥에 들어간다고 봐야 할것이다. 

베트남 전쟁(월남전쟁)은 1955년 11월 1일에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서 시작된 전쟁입니다.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합니다.
 

1955년부터 1975년까지 계속된 이 전쟁은 민족적인 공산주의자들인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과 싸운 내전의 성격이 있는 반면,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들이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개입하고, 이에 맞서 중국과 북한도 비공식적으로 각각 전투원을 파견하여 북베트남을 지원함으로써 국제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6.25전쟁과 더불어 냉전 기간의 대표적인 전쟁입니다. 대한민국군 32만명이 파병하여 5천명이 전사하고 31만명이 생존 귀환하였습니다.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전쟁은 결국 공산주의 월맹(베트남민주공화국+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당시 민주진영인 월남(남베트남)의 패망이 절대로 군사력과 국력이 뒤졌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월남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으로부터 지원받은 전투기 600여대, 헬리콥터 900여대 등으로 공군력이 세계 4위에 이르렀으며, 70만 병력의 월등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월남이 패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월남이 진 것은 군사적인 패배로 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치 전쟁, 피 안 흘리는 전쟁”인 이른바 통일전선 전쟁에서 월남 내부가 붕괴되어 나라 전체가 무너졌던 것입니다.

자유 월남을 패망시킨 주역은 월맹군과 베트콩의 게릴라작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호치민'이 1930년 창당한 베트남 공산당원과 민족해방전선의 '웬후토'가 양성해서 침투시킨 5만여명의 비밀조직원 때문이었습니다. 전체 인구의 0.5%를 차지한 이 간첩들은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로 위장한채 시민, 종교단체는 물론 대통령비서실장과 장관, 도지사등 권력핵심부에 침투하여 반미, 반전 데모를 주동하는 선동전략을 펼쳤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부패한 월남인의 관료의식도 패망의 원인제공에 빼놓을 수 없습니다. 당시 월남정규군은 55만이였는데 이중 10만명 이상이 뇌물을 주고 비공식 장기휴가를 받아 대학에 다니거나 취업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장군들이 운영하는 사(私)기업에 파견되어 무보수로 일하는 사례까지 있었습니다. 지도층의 사리사욕과 부정축재, 황금만능주의 병폐는 체제 파괴세력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이로 인해 군의 사기는 떨어졌으며 이념무장으로 철벽된 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어려웠습니다.

여야 구분 없는 정쟁으로 심각한 사회적 혼란 상태에서 당시 월남 내 공산월맹을 지지하는 세력이 정치, 언론, 학계, 종교계에 뿌리 깊게 확대돼 있었으며 그로 인해 반정부, 반전 시위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특히 공산월맹정권은 ‘외세배격’, ‘민족화합’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종교계 인사를 포섭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오랜 기간 식민지를 경험해야 했던 베트남인들에게 ‘민족화합으로 자주적 통일’을 이루자는 주장은 마치 경전처럼 마음속 깊이 각인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베트남인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불교의 승려와 천주교 신부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산월맹정권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결국 그들이 소신껏 펼치는 설법과 설교는 궁극적인 사회 지향점과는 점점 더 먼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이들 반정부 세력은 ‘민족화합’이라는 이름으로 미군철수를 성공시켰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민주진영은 공산월맹정권에 ‘무조건 항복 선언’을 하고 말았습니다.

30년 전 월남패망은 이렇듯 분단 국가인 우리에게 값진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국론분열을 극복하고 민족통일 이전에 평화정착을 앞당기는 최선의 방안이 무엇인가 냉철히 뒤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펌 국가보훈처]  http://mpva.tistory.com/1137

1. 베트남은 어떤 나라인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은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사회주의국가이다. 북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라오스 및 캄보디아와 국경을 접하고, 동쪽과 남쪽으로는 남중국해에 면해 있다. 동남아시아 본토 중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수도는 하노이이며, 최대 도시는 호찌민 시이다.

 이 나라의 명칭은 베트남어로 "Viet Nam(월남, 越南)"인데 이것은 오늘날 베트남 북부와 중국 남부를 지배하였던 옛 베트남 왕조인 "Nam Viet(남월, 南越)"의 명칭을 거꾸로 쓴 것이다. 또한 같은 혈족인 중국계의 위에족도 고대에 중국 남부에 가까이 살던 민족의 이름이다.

 베트남은 1945년 프랑스령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언, 같은 해 9월에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발족시켰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1946년에서 1954년까지 베트민(베트남 독립동맹)군과 전쟁을 전개하였다(제1차 인도차이나전쟁). 그러나 1954년 5월 프랑스군의 거점인 디엔 비엔 푸의 함락으로 같은 해 7월 휴전을 위한 제네바 협정이 체결되었다. 협정의 내용은 북위 17°선을 잠정적 군사경계선으로 정하고, 2년 후에는 전국적으로 선거를 실시하여 통일국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55년 남베트남에 고딘디엠 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반대하는 공산분자들은 테러 공격을 감행하였고, 1960년 12월 남베트남에서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이란 이른바 '베트콩'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또한 호치민[胡志明]이 이끄는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의 원조를 받아 더욱 세력을 확장하였고, 선거를 통해 베트남 전역을 장악할 수 없게 된 공산측은 군사적인 수단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1961년 미국 대통령 J.F.케네디는 처음으로 미국 정규군을 파견, 베트남에서 '특수전쟁'을 전개하였는데, 이는 남베트남의 공산화는 동남아시아의 공산화를 가져온다는 견지에서 취해진 미국의 대공산주의 봉쇄전략의 일환이었다. 이어 L.B.존슨 정부는 1964년의 통킹만 사건(미국 구축함에 대한 북베트남의 어뢰정 공격)을 계기로 미군을 직접 전투에 참가시켰다. 1965년에는 북폭(北爆)을 개시하였으며, 1968년까지는 미지상군의 투입도 54만 명으로 확대되었고 전비(戰費) 또한 54억 달러에서 288억 달러로 늘어났다.

 한편 1968년 5월부터 평화교섭을 위한 '파리회담'이 계속되었으나, 전황은 캄보디아(1970)․라오스(1971)로 확대되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양상을 띠기에 이르렀다. 한편 한국을 비롯해 타이․오스트레일리아․필리핀․뉴질랜드 등 우방국이 참전하였으나,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결국 1973년 1월 27일 베트남에서의 전쟁종결과 평화회복에 관한 '파리협정'이 미국․남베트남․북베트남․베트남 남부 공화임시혁명정부의 4자간에 체결되었다.

협정은 ① 미군의 철수, ② 전쟁포로의 송환, ③ 현상대로의 정전, ④ 남베트남에서의 사이공 정부와 임시혁명 정부 간에 연합정부 조직을 위한 협의, ⑤ 정치범의 석방 등을 규정하였다. 그러나 북베트남과 이들의 지원을 받는 베트남 남부 임시혁명정부는 1975년 4월 말 사이공을 점령함으로써 베트남을 적화 통일하였다.

 2. 자유베트남 패망의 원인

 자유베트남 패망의 원인으로는 (1) 베트콩과 푸락치 (2) 좌파언론 (3) 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들 수 있다.

 (1) 베트콩과 푸락치

자유베트남 패망의 가장 큰 원인은 베트콩과 푸락치의 존재에서 찾아야 한다.

베트콩은 1960년 12월 20일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아 결성되어 남베트남 및 미국과 전쟁을 치른 베트남민족해방전선(Vietnamese National Liberation Front:NLF) 소속으로 정식명칭은 Viet Nam Cong San이며 베트남공산주의자(Vietnamese Communists)라는 뜻이다.

 당초 NLF는 1954년 사이공에서 좌경 지식인을 중심으로 공산주의가 아닌 민족주의를 이념으로 출발하였으며 활동방법은 평화적인 데모나 법에 대한 호소를 기본으로 하였으나, 1957년 이후 남베트남 정부의 탄압이 심해지자 폭력을 병용하게 되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동참함으로써 공산주의운동으로 변질되었다.

 197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월남 국토 44개 성(省) 중 12개 성의 곳곳에만 표범의 반점처럼 공산군 점령지가 남아 있었다. 총 인구의 90.5%는 월남이 지배하고 있었고, 나머지 중 5%는 낮에는 월남, 밤에는 공산측이 지배하는 경합(競合) 지역, 그리고 4.5%는 공산측 지배하에 있었다.그래서 월남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경제력 우위를 바탕으로, 공산측 지배를 월남 내(內)에서 자연스럽게 소멸시킨다는 전략을 세웠다. 휴전 무렵 월맹은 오랜 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매년 80만∼100만t의 식량부족,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맹은 줄기찬 대남공세를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휴전협정 이전부터 숱한 공산당 프락치들이 월남 곳곳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호치민이 1930 년 2월에 창당한 베트남 공산당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의장인 웬후토가 1962년 1월에 창당한 인민 혁명당에서 침투시킨 조직원들이었다. 그래서 월남 패망 당시 월남에는 공산당원 9,500명과, 인민혁 명당원 4만 명, 즉 전체인구의 0.5% 정도가 월남 사회의 저층(底層)에서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1969년 6월 6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베트남 임시혁명정부로 개편될 당시 이 정부의 법무장관이었던 쫑뉴탄의 증언에 의하면, 캄보디아 국경선근처 빈룽성 내의 지하 땅굴에 있던 혁명정부 청사에는 월남정부의 각부처와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회의내용이 단 하루후면 상세하게 보고될 정도로 티우정권의 핵심에 공산 프락치가 침투해 있었다고 한다.

 1967년 대선(大選)에서 차점으로 낙선한 쭝딘쥬와, 당시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를 위시한 많은 정치인·관료들이 모두 공산 프락치였음이 알려진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었다.

반면 월남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벌어질 때마다 대공(對共) 전문가들이 쫓겨나는 바람에, 월남 대공기관과 정보기관은 형해(形骸)만 남아버렸다. 그들은 대(對)월맹 정보 수집은 말 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월남 내부에 침투한 공산 프락치 검거에조차도 무기력했다. 한 나라를 망하도록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보다도 그 나라의 정보기관부터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휴전협정 이후 월남은 월맹보다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도 월등히 앞서 있었다. 그래서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은 상황을 너무도 쉽게 낙관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의 하나 월맹군이 도발하더라도 즉시 미국의 해공군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할 것이고 이후 대(對)월맹 경제 원조도중단하면, (당시) 세계 4위를 차지할 정도로 월등한 월남군 기동력과 화력으로 월맹군의 공세에 당연히 맞설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 누구도 공산군이 남침하리라고 믿지 않았다. 오랜 전쟁 후에 온 휴전 체제에서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래서 국방과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혹은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았다. 결국 그 믿음이 국방을 소홀히 하도록 하였고, 내부적으로도 극심한 정쟁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1975년 9월에는 월남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정치인들은 대선 승리를 위해 이합집산과 분열, 반목, 대립과 갈등을 유감 없이 연출했다. 고질적인 사회악이었던 뇌물과 마약, 매춘과 도박이 정치권의 혼란과 맞물리면서 마치 전염병처럼 전 국토를 휩쓸었다. 정부의 부정부패는 국민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계층 간 갈등이 조장됨으로써 공산 프락치들의 활동공간은 점점 넓어져 갔다. 결국 선거가 최후의 자유선거가 되고 말았다.

한편 월남에서는 천주교의 짠후탄 신부, 불교계의 뚝드리꽝 스님 등이 모여서 「구국(救 國) 평화 회복 및 반(反)부패 운동 세력」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 산하에 사이공 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일종의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반부패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문제는 이 순수한 반부패 운동 조직에 공산당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거대한 반정부·반체제 세력으로 변질시켜 버렸다는 점이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100여 개의 애국단체, 통일 운동단체들이 수십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월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목사, 승려, 학생, 좌익인사들이 한데 뒤섞여 반전운동, 인도주의 운동, 순화운동 등 상상 할 수 있는 그 모든 운동단체들을 총동원하여 티우 정권 타도를 외치고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1975년의 월남은 월맹 정규군의 무력으로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패배한 것 이상으로 이들 100여 좌익 단체의 선전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다.

 1974년 10월, 월남에서는 유전(油田)이 발견되어 온 국민이 흥분에 휩싸였다. 나라 전체가 평화 무드에 젖어 있던 상태에서 석유까지 발견되자 사람들은 더욱 자유분방함과 안일주의에 기울어 갔다. 그러나 바로 그 무렵, 월맹의 하노이에서는 극비리에 남침을 위한 비밀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레준 서기장은 당시 닉슨 대통령 사임으로 어수선한 미국이, 월맹이 남침공세를 펴도 월남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않을 것이라며 전쟁의 결정을 내렸다.

 1975년 1월 8일, 월맹군 18개 사단 총병력을 월남 공격에 투입하기 위한 군사력 배치가 개시됐다. 이 총공세를 현지에서 지휘하기 위해 월맹군 육군참모총장 반띠엔둥 대장이 1975년 2월 5일 하노이 공항에서 AN-24기를 타고 극비리에 이륙했다. 반띠엔둥 대장은 2월 6일 호치민 루트를 타고 중부월 남 고원지대의 전략 요충인 반 메뚤의 서쪽 밀림 지대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그가 중부월남으로 잠입한 사실을 기만하기 위해 하노이에서는 그와 비슷하게 생긴 가짜 반띠엔둥이 볼가 승용차를 타고 매일 저택에서 월맹군 총사령부로 출퇴근을 하도록 했다. 반띠엔둥은 배구를 즐겼는데, 운동 시간이 되면 가짜 반띠엔둥이 나와 배구를 하는 등 치밀하게 철저한 위장을 했다. 그러나 이미 거덜이 난 월남 정보기관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2) 좌파언론

베트남전쟁에서 자유월남의 패망원인 중 하나가 좌파 언론 때문이었다. 베트남 전쟁당시 월남 정부는 민주화의 구호에 현혹되어 무한한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베트남 전쟁이 잔인한 전투 장면과 전쟁 상황이 아무 여과 없이 그대로 방영되었다. 이런 장면이 전파를 타고 전 세계로 방송되었다. 미국의 국민들, 특히 젊은 세대들이 이 방송을 보고 반전시위를 벌였고 미국내에서의 전쟁의지를 약화시키고 국론이 분열되었다. 미군을 철수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미국전체로 퍼졌고 언론은 반전평화를 외치기 시작했다.

 월맹은 그 잘난 언론 덕택에 월남에서 미군을 힘들이지 않고 철수 시켰다. 베트남 전쟁의 주요 작전상황이나 국가기밀이 언론과 출판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1급기밀이 공식석상은 물론이고 술집에서 이야깃거리라 되어 월맹군에게 들어갔다. 월맹군은 68년과 69년에 미군의 폭격계획을 술자리에서 듣고 미공군과 해군을 비웃으며 미리 도망쳤다. 미군 1개연대의 작전계획을 미리 알고 정글로 유인해 힘들이지 않고 전멸시켰다. 월맹에 포섭된 민간인들은 외국의 종군기자들에게 미군과 한국군이 양민학살을 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미군과 한국군의 사기가 저하되었다. 이 사실을 그대로 믿은 월남언론과 종군기자들은 이를 본국에 퍼뜨렸다.

 베트콩이 한 학살을 한국군이 한 것처럼 꾸며 외국언론에 유포시켰다. 미국으로 부터 밀수입한 M16소총으로 민간인을 죽인 뒤 한국군 시체나 미군시체의 군복을 입히거나 시체를 같이 방치하여 외국언론은 이를 그대로 믿은 것이다.

 

월남과 월맹이 평화협정을 맺자 월남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시민단체와 언론이 무더기로 생겨났다. 특히 인권과 민주화를 외치는 사회단체의 숫자가 많았다. 이들은 모두 공산주의를 싫어한다면서 미군철수와 인권보호 반전평화를 외쳤다.

 종교단체들도 거기에 앞장섰다. 평화의 투사라는 탁낫한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전쟁하면 안 된다, 월맹과 싸우러 나가려는 애국청년들이 있으면 군용도로에서 드러눕고 말하기를 전쟁하지 마라 왜 한민족끼리 싸우냐며 호통을 쳤다. 월남의 언론과 사회단체는 그를 영웅으로 방송했다. 월남국민 그 방송을 보고 그가 옳다고 믿기 시작했다.

 평화협정이 맺어진지 2년이 지난 1975년 월남에서는 반공과 자주국방을 외치면 수구로 간주되었고 정부에서 추진하는 극비계획이 있으면 국민이 알권리를 막았다며 무조건 공개하는 것이 아예 관례가 되어 국가에 기밀이란 것이 없었다. 월남패망직전 미군은 그래도 자유진영의 수호자로서 임무를 다하기 위해 베트남 국민들을 최대한 헬기와 군함으로 구조하고 전장에서 후퇴하지 못한 패잔병, 포로들을 데려오기 위해 특수부대를 이용해 구출작전을 실시했다.

 구출작전의 40%가 실패하였다. 잘난 언론 때문이었다. 미군은 월남이 수개월이내에 패망/할 것을 알고 있었다. 미리 패잔병과 포로들을 구출하려 한 것이었는데 구출작전계획이 월남의 언론에 여과없이 보도되었다. 미군의 포로구출작전을 알게된 월맹은 포로들을 미군들이 구조하기 힘든 내륙으로 이동시키고 미군이 올 자리에 매복조를 배치시켰다. 그 결과 구출작전에 나선 미군특수부대가 많은 피해를 입었고 미군과 한국군 포로들은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이역만리 타향에서 강제노동과 고문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었다.

 미군과 한국군이 국경부근과 위험지역에서 철수하려하자 월맹군이 후퇴로를 막고 이들을 모두 죽이려 하였다. 미공군과 해군이 폭격기를 동원하여 이들의 후퇴로를 열려하자 월남의 언론이 벌집을 쑤신듯 난리를 쳤다. 폭격을 하게 되면 월맹영토를 폭격하게 될지도 모르고 평화협정을 위반한다며 오도방정을 떨었다. 폭격은 민간인을 죽이는 야만행위라며 언론과 사회단체가 비난하였다.

 공군과 해군 항공대의 도움을 받지 못한 미군과 한국군 이들이 데리고 나선 민간인피난민이 후퇴하면서 수도 없이 죽었다. 좁은 협곡과 정글에서 여기저기서 기관총탄과 폭탄이 무더기로 쏟아져나오고 무전병은 애타케 폭격을 해달라는 무전을 쳤지만 비행기는 오지 않았다. 평화협정이 맺어졌음에도 73년이후 전선에서 후퇴하는 과정에서 수도 없이 많은 미군과 한국군이 희생되었다. 월맹이 미국의 경제제제로 궁핍해지자 역시 언론이 난리를 쳤다. 월맹을 도와야 한다며 같은 민족이 굶어죽는다며 이럴 때는 이념이 중요한게 아니라 같은 민족끼리 도와야 한다며 난리를 쳤다.

 월맹사람과 손을 잡거나 같이 만나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너무나 아름답고 감격적인 모습으로 방송에 나오고 국민들이 그 장면을 보고 월남국민들이 월맹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평화롭게 지내자고 생각했다. TV와 방송의 젊은 기자들은 방송을 만들고 거기에 국가가 통제를 가하면 국민의 알권리를 국가가 침해한다며 반발했다. 미국이 월남에 원조해준 물자가 월맹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미군이 준 최신무기와 탄약도 있었다. 그로부터 2년뒤 월남이 준 무기와 식량으로 무장한 월맹이 쳐들어왔고 월남은 75년 4월 30일 사라졌다.

 (3) 정부와 지도층의 부패와 무능

자유베트남 패망의 셋째 원인으로는 정부와 지도층의 부패와 무능을 들 수 있다.

제일 심각한 문제는 군내(軍內) 부정부패였다. 당시 월남 정규군은 58만 명이었는데, 이 중 10만명이 뇌물을 주고 비공식 장기휴가를 받아 대학에 다니거나 취업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장군들이 운영하는 사(私)기업에 파견되어 무보수로 일하는 사례마저 있었다. 이처럼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는 군인들을 가리켜 당시 월남에서는 「유령 군인」, 「꽃 군인」이라 불렀다.

 비록 독재로 기울기는 했지만 대단히 청렴결백했던 고 딘 디엠 대통령 시절, 월남군은 용맹하게 공산군과 맞서 싸워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그 덕택에 휴전당시 월남은 전 인구의 90%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지도층의 부패였다. 티우 대통령의 사위가 군에 입대했는데, 그는 이름만 군적(軍籍)에 둔 채 외국 유학을 떠나버렸다. 대통령 사위가 그럴 정도였으니, 다른 고관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지도층 아들들은 입대 영장이 나오면 일단 입대한 다음 뇌물을 써서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게다가 월남 지배층은 사리사욕과 부정축재, 황금 만능주의에 빠져 천민자본주의의 극단을 보였다. 반면 「국가에 대한 의무」라는 말에는 코웃음을 치며 등한시함으로써 체제파괴 세력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후방이 부패와 혼란에 빠지고, 사회에 정의감이 상실되자 일선의 군인들은 「저따위 썩은 정권과 나라를 위해 내가 목숨을 바쳐야 하는가」하며 전의(戰意)를 상실했다. 또한 화해와 평화의 분위기가 퍼져나가자 공산군에대한 경계심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월등히 높은 경제력과 막강한 화력을 가졌던 월남군대가, 식량부족으로 고민하던 월맹군에게 허수아비처럼 붕괴한 원인 중의 하나이다 

전부 다 퍼오지는 않았고 .. 아래의 글은 중립적인 모습이 없기에 중간까지만 퍼왔음..

[펌]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3qpd&articleno=1896595#ajax_history_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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